어두운 중세의 어느 마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보는 가운데 한 여인이 나무 말뚝에 묶여 있었다.
“이 여인이 마을에 흑사병을 퍼뜨렸다!” 목사가 외치자 군중은 격렬히 동의하며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두려움보다 오히려 어딘가 초연했다. 왜냐하면 그녀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 붙은 조그마한 벼룩이 죽음을 몰고 온 흑사병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불길 속에서 사라진 진실
그녀는 사실 단순한 약초사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손길이 병을 낫게 한다며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마을에 흑사병이 돌자, 갑자기 그녀는 '악마와 손잡은 마녀'로 몰렸다.
군중의 분노는 그녀의 무죄를 증명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던 그녀는 결국 병을 옮겨 마을에 퍼뜨린 '원흉'으로 지목된 것이다.
사람들은 화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 밤, 마을 어귀에서 또다시 검은 쥐 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알 리 없었다. 그녀의 죽음이 병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욕망이 퍼뜨린 죽음의 그림자
시간이 흘러 16세기 유럽, 이탈리아의 한 항구. 멀리서 선박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부둣가로 몰려들었다. “신대륙에서 온 물건들이야!”라는 선원의 외침에 모두가 환호했지만, 함께 들어온 것은 값비싼 향신료만이 아니었다. 선원의 몸에 감춰진 작은 붉은 반점들. 바로 매독의 시작이었다.
매독은 대항해 시대의 산물이었다.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교역을 확장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병을 전 세계로 퍼뜨렸다. 당시에는 이 병이 성욕의 결과라 여겨져 부끄러운 병으로 취급되었다. 매독에 걸린 사람들은 숨어지내거나, 병이 드러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곤 했다.
죽음을 낭만으로 둔갑시킨 결핵
한편 19세기 파리, 한 가난한 예술가가 다락방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기침을 멈출 수 없었고, 손수건에는 피가 묻어나왔다. 결핵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은 예술을 완성시킨다”며 자신의 병을 낭만적으로 여겼다.
결핵은 당시의 문학과 예술을 상징하는 병이었다. 시인과 화가들은 이 병에 걸린 자신을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로 포장하곤 했다. 반면 매독과는 대조적으로, 결핵은 은밀히 사랑받으며 그들의 작품 속에서 미화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한 연구실. 로베르트 코흐는 현미경 아래 작은 점들을 보고 있었다. “이것이 결핵의 원인이다.” 그의 손에는 결핵균이 들려 있었다. 그의 발견은 신화와 미신으로 가득했던 감염병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한편 그의 연구실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의 조수였던 안나는 사실 매독에 걸려 치료를 받던 환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지식과 열정은 코흐를 감동시켰고, 그녀는 연구를 도와 결국 결핵균의 발견에 큰 공헌을 했다. 안나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헌신은 질병 연구의 진전을 이끈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
과거를 통해 배우는 현재
중세의 광장, 제국주의의 항구, 그리고 19세기의 연구실까지, 세균 감염병의 역사는 인간의 공포와 욕망이 뒤엉킨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대에 들어 우리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 덕분에 세균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세균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병을 키웠던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균 감염병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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